찰스는 있는 힘을 다해 눈길을 뛰어가며 욕설을 내뱉었다. 숨이 턱까지 차 있었지만 절대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벌써 해가 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곳, 독일 검은 숲의 겨울 해는 상상을 초월하게 빨리 가라앉았고, 그에 비해 찰스의 발걸음은 지독스러운 흰 눈에 묶여 느리기 짝이 없었다. 가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은 음력 13일,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괴물'이 나타나는 보름이 되기까지는 겨우 이틀만 남아 있었다.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 나이슬라흐, 고작해야 삼사십여 호의 가옥이 마을 창고가 있는 작은 광장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선 곳이다. 몇개인가의 가게가 있긴 하지만 거기 없는 물건을 사려면 몇시간이고 숲길을 걸어 읍내까지 가야만 할 정도로 한갓진 마을로, 옥스포드를 졸업한 영국인 학자가 와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놈의 '괴물 전설'만 아니라면.
'정말입니다.'
독일인들답게 실로 무뚝뚝한 첫인상을 지녔던 마을 사람들은 그러나, 한달간의 여관비를 선불로 지불하고 눌러앉아 싹싹하게 말을 붙여가며 끈질기게 질문을 던져오는 찰스에게 의외로 자세한 설명을 들려 주었다. 이 애교많은 이방인의 붙임성 때문인지 그가 내민 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괴물'에 대한 질문을 듣는 족족 성호를 그으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조심하세요 영국인 양반, 보름 밤이 되면 절대로 돌아다니면 안돼요. 그 날은 외양간 문도 모두 꼭 닫아놓는답니다.'
'괴물'은 보름달이 뜨는 14일부터 16일 사이에 마을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그 동안, 아니 사실상 그 앞뒤로 일주일 동안 모든 주민들은 해가 떨어지면 곧장 외양간 문을 걸고 창고를 잠그고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많은 사고가 있었어요. 그 때만은 조심하십시오.'
"들여보내 달라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소리쳐 봤지만 마찬가지로 아무도 답해오지 않는다. 새삼 덜덜 떨려오는 몸을 양팔로 끌어안으며 찰스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숲 속의 자그만 마을,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이라고만 생각했던 곳이 이렇게 쓸쓸하고 무서워 보인 적은 없다. 이름 그대로 검은 숲에 둘러싸인 건물들의 검은 그림자 사이에 이상하리만치 밝은 달빛만 떨어진다. 달빛, 아마도 괴물이 지금 자신을 본다면 이 밝은 달빛 덕에 아주 쉽게 찾아내고 잡아먹으리라. 공포보다는 추위 때문에 덜덜 떨며 다른 건물 쪽으로 다가가 보려던 찰스는 누군가 그의 어깨를 친 순간 그만 짧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악!!"
돌아본 곳에 선 큰 그림자를 보았을 때 공포는 순간 경악이 되었지만 그 그림자가 랜턴을 든 남자라는 것을 알아본 뒤부터는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그렇다, 남자였다. 괴물이 아니라 그저 인간 남자 하나. 차가운 표정으로 찰스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꽤 따뜻해 보이는 털가죽 망토를 걸친 등에 뭔가 묵직한 자루와 막대 같은 것을 지고는 랜턴을 들고 서 있었다.
"저기...저......"
잠시 도움을 청하려던 찰스는 곧 이 사람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독일어를 할 수는 있었지만 듣기에 비해 말하기는 그다지 능숙하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깊이 당황한 상태라 문장이 잘 떠올라 줄지 의문이었다. 제발 이 사람이 자기 발음을 잘 알아들어 주길 바라면서, 찰스는 필사적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도와주세요. 전 여기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 왔는데, 문이 닫혔고, 너무 늦어서...]
그러면서 최대한 지금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무엇보다도 춥다고. 하지만 남자는 그런 찰스를 차가운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불안해진 찰스가 잠깐 남자의 생각을 훑어보려 했지만, 이 쪽을 향한 별다른 적의가 없다는 것, 약간은 찰스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 외에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제 말 아시겠어요? 도와주세요.]
슬슬 반응없는 남자에게 부아가 났지만, 그래도 찰스는 열과 성을 다해 도움을 요청했다. 이미 밤이고, 마을 사람들은 이제 절대 찰스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이 남자는 그간 마을에서는 본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아무튼 이렇게 날이 어두워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걸 보면 바로 이 근처에 집이 있는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 아닌가. 그는 찰스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찰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간절히 손을 내미는 순간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상대가 정신병자나 백치가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어떻게든 다시 한 번 매달렸을 것이다.
"정말 못봐 주겠군. 멍청한 짓 그만하고, 여관은 내일 아침까지는 안 열 테니 우리 집에서 묵고 가던가 하시오."
이 곳 사람 특유의 강한 억양이 섞여 있었지만 분명히 매우 유창한 영어였다. 생각지도 못한 모국어에 놀란 찰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자, 남자는 그런 찰스를 잠시 응시하다 곧 몸을 휙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당신, 영어 해요? 영어 할 줄 알아요?"
남자가 멈춰선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고, 냉정한 목소리가 밤 공기를 뚫고 찰스의 귀에 울려 왔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따라오시오. 싫으면 그냥 여기서 밤 새던가."
남자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찰스는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거 살았군요."
"......"
"성함이 어찌 되시나요? 전 찰스 자비에라고 합니다. 여기 온지는 열흘 쯤 되는데 처음 뵙는 분이군요. 괜찮으시다면-"
"에릭."
남자는 그 한 마디만 뱉고는 그 뒤부터 찰스가 뭘 묻건 무슨 이야기를 하건 모두 무시했다. 분명 말도 못하게 무례한 짓이었지만 그럼에도 어쨌건 도움의 손길인지라, 찰스는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어떻게든 남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 보니 오히려 숲에 더 가까워졌다. 불안해진 찰스는 남자의 생각을 조심스레 살펴보았고, 그가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다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쨌건 살았다. 이 자가 무슨 속셈으로 찰스를 도와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이 추운 밤을 눈밭에서 얼어죽을까봐 덜덜 떨며 지새지 않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 아닌가.
이런 순진한 아이 같으니. 잔뜩 몸을 굳히는 에릭을 느끼며 슈미트는 싱긋 웃었다. 나름으로는 인자한 미소였다.
"오해 말거라. 그 인간 나부랭이를 네가 어떻게 대하건 네 마음이니까."
포옹을 풀고 양 손으로 에릭의 머리를 붙든 남자는 여전히 웃으며, 하지만 눈만은 싸늘하게 식힌 채 말을 이어갔다.
"그 인간을 살려서 이 곳에서 내보내고 싶다면 내게 말만 하려무나. 네 애완동물로 갖고 싶다고 해도 난 상관 없다."
곧이어 우득거리는 소리가 집 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에릭의 눈에 경악과 공포가 한꺼번에 차 올라왔다. 지금은 밤이 아니다. 게다가 보름은 이미 지난지 오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잘 차려입었던 옷의 솔기가 툭툭 터져나가고 잠시 후, 에릭의 눈앞에는 이제 어린 시절부터 악몽의 주체였던 바로 그 괴물이 서 있었다. 그릉거리는 음성이 간신히 인간 언어의 형태를 띠었다.
"그 예쁜이의 머리에서 뇌수가 터져나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새파랗게 질린 에릭의 눈앞에서 괴물은 이를 드러내며 선언했다.
"다시는 이 곳을 떠나지 말거라. 넌 내 아이란다."
칼날같은 손톱이 에릭의 머리를 떠나 몸에 와 닿았다. 이를 악문 순간 찢어질 듯한 아픔이 가슴에 느껴졌다. 에릭의 가슴에는 네 줄의 긴 상처가 새겨졌고, 가슴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린 에릭 앞에서 슈미트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온 몸에는 너덜거리는 옷의 잔해가 휘감겨 있었지만, 어깨에 걸쳐뒀던 모피코트만은 바닥에 떨어진 채 무사했다.
그것을 걸친 슈미트는 아무 인사 없이 쓰러진 에릭의 이마에 입맞추고 집 밖으로 나갔고, 예민한 에릭의 귀에는 마차 떠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그 뒤로도 한참동안 에릭은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상처 때문이 아니라 깨달음 때문이었다. 찰스의 말대로 슈미트가 원했던 건 어머니의 죽음이 아니고 바로 자신이었다. 또한 지금 클라우스 슈미트와 만나 이야기 함으로, 에릭은 그가 본질적으로 자신과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버렸다.
늑대인간으로서 에릭은 자신의 모든 것을 저주했지만 그럼에도 가슴 깊이 거의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있었다. 늑대는 결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다. 홀로 온 유럽을 떠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이 곳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불가능했다. 증오스럽기 이를 데 없는 슈미트의 부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타오르는 본능의 외침 같은 것이었다. 모든 것을 공감할 수 있는 이에게 아무것도 숨길 일 없이 함께 눈밭을, 숲을 뛰고 달리며 사냥하고 먹을것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
"찰스..."
나를 이해해 줄 유일무이한 존재, 보호하고 보호받으며 서로를 돌볼 존재, 지금 에릭에게 떠오르는 건 단 한 명의 이름 뿐이었고, 그걸 떠올린 순간 한 가지 진실이 영혼에 와 닿았다. 절대 부정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단 하나의 진실이.
슈미트는 결코 에릭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찰스는 떠날 수 있으리라. 그는 그의 나라로, 집으로 돌아가 다시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그 옆에 자기 자리는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슈미트가 그리 놔두질 않을 테니까.
늑대는, 혼자 사는 생물이 아니니까.
* 중요: 성인 인증 관련
성인 인증 방법은 두 가지 중 편하신 쪽으로 취사선택 하시면 됩니다.
1) 예전에 감자밭에서 성인 인증 후 회지 구입하신 분: 구입하신 회지와 닉네임을 간단히 알려주시면 됩니다.